태고부터 있어온 산신령

로저 셰퍼드 번역 한영환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 상환암 3월에 2010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남북한 양쪽의 백두대간에 대한 나의 탐구는 결국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던 때 한국인들이 가졌던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과 관련되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정치적 신념과 외세의 영향으로 이념적으로 분단되기 이전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무척 매력을 느끼고 있는 한국의 산들은 십장생 병풍처럼 한반도의 문화, 역사 그리고 공통점에 대한 주된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한반도의 산과 관련하여 찾아보려는 것이다.

만약 내가 한국인의 고유한 토착적 특성에 관해 생각한다면, 4세기에 불교가 도래하기 이전을 생각해야할 것이다. 토착적이라는 것은 외국에서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시기까지는 중국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고 있었지만, 한국은 아주 순수했을 것이다. 당시도 한국은 산들에 의해 독특하게 연합되어있었다. 한국인들이 자기의 신(神)들을 찾은 곳은 바로 이들 산이었는데, 그들 신들의 으뜸이 산신령이었다. 모든 산에 산신령이 계시다고 믿었으며, 산의 기운이 가장 강한 곳에서 산신령에 대한 숭배 의식이 행해졌다. 산악 신앙은 환경 인지의 초기 형태로서 전세계에서 행해졌다. 주요 종교가 교세를 세계적으로 확장하기 전에는, 자연이 인류에 대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인정되었다(그런 영향은 오늘날 모든 현대 문명이 크게 결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많은 다른 지역이 자연신을 선호하지 않게 되었지만, 놀랍게도 한국의 산신령은 새로운 종교가 들어온 지 수백년이 지나는 동안 살아남았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숭상되고 있다. 한국은 분망한 다종교 사회가 되었지만, 대부분의 불교 사찰의 경내 한 곳에 산신각이 서있으며, 그곳에는 산신령에게 예배하려는 신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옛 민속 신앙이 여전히 그렇게 인기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산신령이 산의 신이며 산은 한국인의 일부라는 두 개념의 결합 때문일 수 있다. 심지어 산신령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자연에 대해 종교적 느낌을 갖지 않는 사람들도, 그들이 농부이거나 사업가이거나 간에 고향이 어디이며 그 고향을 지켜주는 산이 어느 것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곧 대화가 활기를 띄우며 깊어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기 마을이나 도시의 선조들의 역사와 배경을 산의 역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북한의 산들에 대한 나의 탐승이 아직 생소하며 토착적 민속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지식이 어떤 것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그들이 산을 숭상하고 있다는 것과 그들의 산이 전설과 민속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단군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이나 김일성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이건 간에 산이 그것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있는 일부 주요 불교 사찰의 경내에 그림들이 그려진 산신각이 있지만, 오늘날에 그것들은 본래의 기능을 떠나 문화 유물이 되어있다. 그러나 내가 만난 모든 북한인은 산신령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4세기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던 시기에 산신령의 생존이 처음으로 위협을 받았다. 이때 한국은 처음으로 외래 종교를 진정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의상대사와 자장율사와 같은 초기의 불교 고승들은 부지런히 강산을 돌아다니며 수행도 하면서 절을 지을 곳을 찾았다. 그런 곳은 평화로우면서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성스러운 곳이었다. 그렇게 찾다보니까 그들은 흔히 토착적인 산신을 숭배하는 장소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 대부분의 절은 경관이 아름다운 심산에 자리잡고 있는가? 한편 때때로 산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외래 종교인 불교에 반발했다. 불교가 그들의 산악신앙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소백산에 위치한 부석사(浮石寺)의 유명한 부석 전설이 한 예이다. 대략 같은 시기에 유럽에서도 기독교에 의한 종교적 침공을 경험하게 되어 토착의 성지들이 빼앗기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이룬 타협은 산신령의 전각 건립을 허용하여 주민이 계속 산신을 숭배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이 선례를 한국의 모든 절들이 따랐다. 산신각의 위치는 정상적으로 늘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 그러니까 대웅전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신령이 심지어 부처보다 높은 성스러운 곳에 모셔지고 있다(경내의 외곽이지만). 그 이후 산신령에 대한 숭배가 쇠퇴되었으나 여전히 한국에는 산신각이 남아있다. 한반도에서 산신에 대한 숭배는 어떤 신앙보다 더 오래 존속하고 있다.

2010년 3월 내가 속리산의 한 작은 암자에 머물고 있을 때 산신령 신앙의 중요성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상환암의 산신각은 이 암자 위에 있는 고색창연한 바위 위에 있다. 이 암자가 세워진 장소에 관해서는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있다. 이 암자는 높은 절벽 계곡의 꼭대기 근처의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계곡에서 계류가 거세게 흘러내려가 세심정 옆을 지난다(이 물은 달천에 들어간 뒤 이 달천이 구불구불 흘러 충주호에서 내려오는 남한강에 합류한다). 불교가 전래되기 오래 전에 토착적인 선도(仙道)를 행하던 한국 도교 신봉자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렀던 것으로 여겨진다(선도는 산의 정기를 활용하는 수행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약 1300년 전 법주사 건립 때 불교 승려들이 상환암 터를 놓치지 않고 차지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강한 산의 정기가 발산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암자 위에 자리 잡은 산신각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정말 일품이다.

이곳 산신각의 낡은 벽돌 건물을 헐고 새로 짓게 되었는데, 나더러 그 신축 공사 일을 거들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암자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막일을 했는데, 나는 기술을 요하지 않고 몸으로 때우는 막노동을 그런대로 잘 한다. 그래서 이 산신각 신축 공사에서의 나의 역할도 다르지 않았다. 일단의 일꾼들이 매일 아침 산 위로 1 km 올라가 낡은 산신각을 해체하고 이제 새 산신각의 기초 자재를 산 위로 운반할 때였다. 암자에서 저녁을 먹을 때 그 일의 제안을 받았다. 새 산신각 기초에 시멘트가 필요했는데, 40 kg 짜리 시멘트 부대들을 어떻게 산 위로 올려갈 것인지에 관해 활기찬 논의가 있었다. 그런데 누가 그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겠느냐가 논의의 초점이었다.

지게질은 한국의 농사꾼과 행상이 수천년 동안 행해온 기술이다. 나무로 만든 지게에 무거운 짐을 얹고 그것을 등으로 진 모습은 또한 정신적 수행을 하는 사람에게는 깊은 명상을 하는 자태처럼도 보일 수 있다. 나는 이 짐지기에 같은 생각으로 대했다. 시멘트 부대와 같은 엄청난 무게를 질 때 아주 중요한 도구는 지팡이이다. 이 지팡이를 짚어야 앉은 자세에서 일어날 수 있고, 산길 여기저기에서 나타나는 여러 큰 돌들과 나무뿌리 위를 걸어갈 때 지팡이를 사용하여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우리는 한 팀으로서 며칠 동안에 약 1000 kg의 시멘트를 가파른 산 위로 올려가야 했다. 이 일 동안에 우리가 경험한 동료애는 바로 육체노동자들의 즐거움이었으며, 육체적 운동 자체도 가르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진짜 일은 뒤에 있었다. 부어놓은 시멘트가 완전히 굳기 전에 산신각의 초석으로 사용할 80 kg짜리 화강암 4 개를 산 위로 올려가는 일이 남았다.

80 kg짜리 돌을 등에 지고 가파른 산 위로 올려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등, 관절, 근육 따위가 제대로 견디어낼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돌덩어리를 얹은 지게를 등에 지고 일어서려면 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 다음 첫 발자국을 내딛기 전에 자기의 기본 체력으로 몸을 가눌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균형을 잃으면 몸의 전복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의 전복을 막으려고 시도하다가는 근육과 인대가 뼈에서 떨어져나가고 말 것이다. 오르는 산길의 한편은 가파르게 떨어져있기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잃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바위 면을 따라 떨어지게 될 것이다. 계속 균형을 잡고 몸을 곧게 세울 수 있게 돕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단단한 지팡이이다. 그 지팡이를 마법사의 지팡이처럼 가볍게 사용할 수도 있고 그것을 집고 산길을 안전하게 오를 수도 있다. 네 개의 화강암을 모두 지고 올라간 것은 나였는데, 꼬박 이틀 걸렸다. 다만 몇 명의 친구가 함께 가다가 필요할 때 나를 도와주었다. 등산객들이 내 옆을 지나갔는데, 재미로 산행을 하는 그들은 외국인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여겼을 것이다. 새 산신각을 짓는데 쓸 자재를 올려간다는 말을 듣자 그들은 놀라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때때로 내가 장난으로 두 손을 모아 내밀면서 천원짜리 한 장을 구걸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으며 그 다음 귤을 까먹으면서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상환암에 머무는 동안 산신각 신축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새 산신각 건축에 기여했기 때문에 그것에 애착을 느끼고 있음을 인정한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굳기 전 시멘트에 내 이름을 써놓을까 하는 유혹을 느꼈다. 천 년 뒤 다시 새 산신각을 지을 때 시공자가 기초에서 외국인의 이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때의 한국의 모습은 어떨까? 산악 신앙의 옛 형태가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여러 종교적 및 정치적 변화를 이겨내고 남아있음을 볼 때 나는 그 때에도 한국인은 산과 산에 있는 신령을 여전히 숭배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도 암자는 새로운 현대적 형태의 우주적 종교로 대체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하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 곳의 새 주인은 그곳에 산신각을 두어야 할 것으로 안다. 왜냐하면 산들처럼 산신령은 심지어 인간이 거기에 오기 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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