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 통일! 통일! 통일!”

“그러니까 내일(8월 15일) 판문점에서 정확히 뭘 하는 거죠?” ‘조선해방70돐경축 국제련대성행사International Solidarity Event in Celebration of the 70th Anniversary of Korea’s Liberation’에 초청받아서 온 호주 대표단의 일원인 피터 우드에게 내가 물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느릿한 말투로 재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코리아의 통일을 촉구하는 시위에 참가할 거요.”

“그럼 그건 가벼운 소풍이 아니구만요?”

“물론이요!” 그가 대답했다. “깃발을 휘날리면서 목청껏 외치는 집회가 될 거요.”

‘맙소사!’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 오후에, 전시회 행사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주체탑에서 청년중앙회관까지 1킬로미터 거리를 걸어가는 ‘련대행진’에 참가했었다. 나는 호기심과 주최측에 대한 존중심에서 그 행진에 참가했다. 외국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행진했다. 행렬 맨 앞에는 하얀 제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여성 취주악대가 화려하게 앞장섰다.

해지기 직전의 늦은 오후였다. 주황색 석양빛이 거리를 물들였다.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우리가 행진해가는(그냥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것에 가까웠지만) 동안 도로변에 늘어선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통일! 통일! 통일!” 하고 구호를 외쳤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청년중앙회관에 도착하자, 우리는 안으로 안내되어 젊은 음악가와 무용수들이 벌이는 예술공연을 한 시간 동안 관람했다. 그들은 관중들도 함께 춤을 추도록 초대했는데, 그 때 누가 내 팔을 잡길래 돌아보니 박경일 협회장이었다. 그는 “이리 오시오 로저 동무, 우리도 춤을 춰야 하오.” 하면서 은근히 압박했다. 마지 못해 춤추는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끌려 들어가자마자 조선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춤을 추다가 박경일 협회장을 찾았더니 그는 어느새 저만치 구경꾼들 사이에 멀쩡히 서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활짝 웃음을 띠며 손을 흔들었다.

‘제대로 걸려들었구만,’ 나는 속으로 실소했다.

평양 Pyongyang solidarity march©AMilnes.We are OneSolidarity March Pyongyang 2015청년중앙회관.

내가 목격한 ‘련대행진’의 사뭇 애국적인 분위기가 다음날의 판문점 행사 내용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는 통일과 연대에 대한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러니 내가 목격한 바와 피터가 한 말에 비추어보자면 판문점 시위에 참가한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판문점은 심각하고 진중한 곳이다.

나의 정체는 등산가이자 사진가이자 코리아의 산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다. 나는 독자적으로 일하고 있지, 누구를 대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한반도에서는 정치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아마 산속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선해방의 날’인 지금 평양에 와 있고, 산은 저 멀리 있다.

“황승철 동무, 당신과 박경일 협회장님과 의논할 게 있습니다.”

“좋아요, 무슨 일입네까?” 우리는 근처에 있던 박경일 협회장을 불렀다.

“내일 판문점에서 시위를 한다면서요?”

“예, 자주적 조국통일 결의대회(Grand Meeting)라고 하디요.”

“좋아요, 그게 얼마나 ‘큰(Grand)’ 대회인데요?” 내가 웃으며 물었다. “종일 항의 구호를 외치고 그러는 겁니까?”

“예, 그렇지만 평화롭고 질서 있게 할 겁네다.”

나는 그게 어떤 모습일지를 마음속으로 그려봤다.

 “황동무, 난 이거 하면 문제가 생겨요.” 그는 내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다. “코리아의 통일은 나로서도 너무나 바라는 바이지만, 판문점은 성격이 다른 곳이에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를 바라본다. “우선, 나는 이 문제에서 어느 한쪽의 편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남쪽에 살고 있고, 거기 사는 게 좋아요. 그리고 거기엔 나의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진을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남쪽 사람들이 일해준 결과물이고, 물론 동시에 여러분의 훌륭한 협조 덕분입니다. 만일 내가 남한 당국이 보는 앞에서 판문점에 서서 남한에 항의하는 구호를 외친다면, 그건 나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짓입니다. 난 그런 짓은 할 수 없어요!”

황동무가 나의 심경을 박경일 협회장에게 통역하여 전했다. 그들을 실망시켜서 사태를 부정적으로 몰아가게 될까 봐 조바심이 나긴 했지만, 나는 내가 옳다고 느끼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의논하고 있는 중에 나는 다시 끼어들어서 정중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대처합시다. 내가 만일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으로 간주된다면 나는 상대편의 적이 됩니다. 나는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나는 산과 문화에 관한 나의 작업을 통해서 양쪽을 다 응원하려고 여기에 와있는 겁니다. 우린 앞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황승철과 박경일은 나의 곤경을 금방 이해하고 나의 안위를 진지하게 염려해준다. 그들의 동정 깊은 마음씨가 고맙다. 이 사람들은 진짜 내 친구다. 외부인인 나에겐 이들이 조선사람이나 한국사람이 아니라 코리아사람이다. 그냥 Korean 말이다.

“원하신다면 평양에 남아있어도 됩네다.” 박경일 협회장이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에요, 그래도 가고 싶어요. 하지만 사람들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진 않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이건 명심합시다. 난 이 중에서 남한에 살고 있는 유일한 외국인인 것 같습니다. 예컨대 호주 사람이나 아일랜드 사람들 같으면 깃발을 흔들고 마음껏 소리지르다가도 마누라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난 인천을 통해서 전라도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내가 시위하는 모습을 판문점 저쪽 거울유리창 뒤에 있는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나는 돌아가서 의심을 받을 거고, 그렇게 되면 비자도 얻기가 힘들어져서 쫓겨날 겁니다. 난 그 지경까지 말려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난 이런 일을 하고 싶지 않다. 징계가 두려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 난 언제든지 살기 좋은 내 나라로 돌아가면 된다… 난 단지 누구의 편을 들고 싶지 않은 것일 뿐이다. 나는 양쪽으로부터 다 배우면서,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외교관과 같은 태도로 한반도에 머물고 싶다. 아직도 길은 멀고,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아무튼 다음날(8월 15일) 아침, 나는 일정보다 30분 앞서서 기다리고 있다. 북조선 정부가 이날을 기해 표준시를 일본이 1912년에 바꿔놓기 이전인 1908년의 원래 표준시로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판문점을 향해 출발한다. 20여대의 버스를 비롯한 차량행렬은 개성의 통일식당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춘다. 판문점에 이르자 연중 가장 더운 날로 느껴지는 열기 속에 큰 무리의 군중이 뒤쪽으로 운집한다. 여성 취주악대가 다시 등장한다. 박경일 협회장이 내게로 와서 말한다. “로저 동무 이리 오시라요.” 기억난다. 전날 그가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여성동무와 춤을 추게 됐었다. 그는 판문각 2층의 큰 회의실로 나를 데려간다. 거기서는 군사분계선 위에 놓인 파란색 회담장 건물과 남측 자유의 집이 내다보인다. “화장실 갈 때 말고는 여기서 꼼짝 말고 계시라요.” 그가 친절한 목소리로 일러준다. 방안을 둘러보지만 유감스럽게도 여성동무는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군중이 대열을 정비하자 시작을 알리는 취주악대의 소리가 들린다. 천오백 여명의 사람들이 본관 아래 남한측 맞은편의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는 소리가 내 발 밑을 울린다. 나는 그 광경을 다 내려다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한 무리의 벌떼가 분봉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저마다 깃발이나 현수막 등을 들고 계단 위에 정렬한다. 연설이 시작된다. 해외동포들과 외국인들이 저마다 마이크 앞에서 소리 높여 연설을 한다. 그들의 말은 모두 휴대용 확성기를 통해 조선말로 통역된다. 연설 중간중간에 노래와 “통일! 통일! 통일!” 하는 구호가 끊임없이, 갈수록 크게 이어진다.

이 모든 와중에 나는 꽃무늬 카페트에 긴 커튼이 드리워진, 담배냄새 자욱한 큰 방안에 거의 홀로 앉아 있다. 외톨이가 된 이 느낌을 글로 끄적여본다. 나도 끼고 싶다. 하지만 양쪽에 다 끼고 싶다. 산이 어떻게 해서 날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산이란 것이 이토록 사람과 불가분한 무엇인가?

 “조국은 하나… 우리는 하나…” 군중의 구호 소리가 들린다. 밖을 내다보려고 일어난다. 치켜든 주먹과 깃발들의 바다 너머, 남쪽 편에 보이는 것은 텅 빈 건물들뿐이다.

Front gate to Panmunjom 판문점.판문점.판문점8월15일©AMilnes.판문점8월15일©AMilnes.판문점8월15일©AMilnes.판문점8월15일©AMilnes.평양 여성관악대.

한 시간쯤 지나자 시위가 끝난다. 나는 방을 나와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오는 것을 지켜본다. 북조선 사람들, 해외동포들, 온갖 인종의 외국인들, 모두가 무자비한 더위에 땀을 흘리면서도 웃고 있다. 그들이 뒷마당으로 쏟아져 나오자 취주악대가 건물 옆으로부터 행진해 나온다. 발꿈치 맞추는 소리와 함께 제자리에 멈추고 악대도 휴식을 취한다. 그들은 지쳐 있다.

돌아오는 버스 속, 나는 텅 비어 있는 남한 쪽의 광경을 떠올리고 있다. 판문점이 남과 북이 마주보고 통일촉구 집회를 벌이기에 썩 좋은 장소는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안다. 그리고 통일의 형태에 대한 양쪽의 관점 차이 외에, 안전 때문에도 이곳에서 그런 식의 행사를 벌이기가 얼마나 어려울지를 알겠다. 만약 감정이 과열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판문점에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문자 그대로 노란 페인트칠 된 선 하나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모종의 합의만 도출해낼 수 있다면 그런 일도 평화로운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뉴질랜드조선 친선협회의 친구인 피터 윌슨 쪽으로 몸을 기울여 물어본다. “피터, 언젠간 판문점에서 남북이 연합행사를 여는 일도 가능할까?”

“이미 진행중이야, 로저.” 우린 판문점에서 남북 양측의 아이들이 평화의 노래를 부르는 남북연합 평화콘서트를 기획하고 싶어. 일부 아이들은 외국에서 와서 한국말로 노래를 배울 거야. 그러기 위해서 남쪽과 북쪽의 가정에서 잠시 함께 살게 하는 거지.” 그가 대답했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로비에 서서 시위 참가자들이 몰려 들어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강영명 이 내 옆에 서 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주최측 인사 중의 하나여서 친해지게 되었다. 그는 아주 붙임성 있는 젊은 친구다. 그에게, 오늘은 정말 만감이 교차한 날이었다고 말한다. 그가 대꾸한다. “분단은 고통스럽습네다. 하지만 하나가 된다는 건 더 고통스러운 일입네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디요.”

나는 생각한다. 틀린 말 아니야.

34_solidarity march

Roger Shepherd©2015

평양서 열린 백두대간 사진전시회 Daum storyfu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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