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의 세계 – 금강산

로저 셰퍼드 번역 한영환
금강산 강원도 고성군 10월에 2011
 

우리가 탄 자동차가 평양 시내를 달렸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앞창을 통해 비쳐 들어왔다. 그런데 앞창의 오른편 위쪽에 AK47(역주-러시아제 자동 소총)이라는 글씨에 붉은 색으로 X 표시가 그어진 둥근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것은 이 자동차가 무장을 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표시였다. 진한 황록색 옷을 입은 다양한 주민들이 바삐 일터로 가는 것을 보면서 이 스티커가 북한에서의 나의 안전을 보장해줄 것에 관해서 생각했다. 앞으로 16일 동안 내가 아주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산행 여행을 할 때 결코 AK47과 마주칠 일이 없기를 희망했다.

금강산은 오래 전부터 많은 유명한 코리아의 화가와 문인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고려 때에는 이곳이 이상적인 불국토로 여겨졌다. 그런 영향으로 인도인 지종 스님이 금강산에서 수행했다. 조선 때 많은 왕, 문인, 화가, 선비 등이 금강산을 예찬했다. 그런 문인 중의 한 분이 김양수(1820-1882)로, 금강산 기행문을 남겼다. 김양수는 금강산이 중국의 어떤 산보다 더 아름답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과장되게 불가사의한 표현으로 나타낸 일부 불교식 묘사를 경멸했다. 대신 그의 접근법은 단순한 마음으로 금강산의 위용을 보는 것이었다. 즉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일찍 일어났는데, 나는 금강산에 대한 나의 인상이 그렇게 단순할지가 궁금했다. 산신령이 축복한 듯이 날씨가 무척 좋았다. 하늘은 아주 푸르고 공기는 시원하고 깨끗했다. 그리고 공기에는 미묘한 고요함이 깃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텅 빈 적막같은 것이었다. 사실 우리 일행 네 명이 만물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천국이었다. 나는 10월 중순의 추색(秋色)을 포착하기를 희망했었으나, 우리가 텅빈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바로 며칠 전 몹시 차가운 시베리아 바람이 붉은 단풍잎들을 떨어뜨려버렸음을 곧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산신령의 산 경치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예리한 칼처럼 날카로운 바위로 된 첨봉(尖峰)들이 우리 위의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 날카로운 봉우리들의 그림자가 우리 위를 덮고 있었다. 여기에 홀로 있는 우리는 그저 생쥐들이었다.

그 다음 날에야 나는 금강산의 단풍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옥류동의 물이 흐르는 계곡에 도착했을 때, 보석처럼 고운 색의 단풍이 펼쳐져 있었다. 산 사면에 있는 많은 나무들이 밝은 노란색, 주황색, 붉은색으로 불타는 듯했다. 우리 밑으로는 계곡 물이 골짜기 바닥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자동차 크기의 바위들 사이로 소리를 내면서 흘러내려갔다. 나는 김양수, 김삿갓, 김정호, 원효 대사, 자장 율사, 서산 대사 등 여러 분들을 생각하면서 과연 그들은 이런 아름다움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었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겼다. 그런 아름다움을 나타낼 꼭 맞는 말이 없었다. 이곳을 표현할 진정한 문구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그렇게 오래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울긋불긋한 숲 위에 있는 높은 세존봉의 벽이 이상한 색을 지니고 있었는데, 마치 흰 성진(腥塵)을 뿌린 듯이 보였다. 아마도 완벽한 광선 때문이겠지만, 그 산 경치는 포토샵 소프트웨어로 그래픽 디자인한 듯이 보였다. 나는 그런 혐오스러운 21세기의 조작과 비교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혼자 웃었다.

우리 앞으로 계곡의 끝에 금강산 지역에서 가장 높은 비로봉(1630m)의 큰 둥근 봉이 솟아있었다. 마치 거대한 성자 같은 비로봉은 옥류동 계곡을 내리덮을 듯했다. 정상 근처에 작은 구조물이 보였는데, 전망을 보기 위한 판대라고 한다. 그것은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가이드에게 금강산에 모두 몇 개의 등산로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셀 수 없이 많다고 대답했다. 수백년 전부터 산길들이 있었던 것이다. 금강산과 같은 극적으로 복잡한 산계(山系)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면 사람의 마음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하고 나는 상상해보았다.

뒤에 우리는 유명한 구룡폭포로 갔다. 폭포 반대편에 있는 정자에서 일단의 북한인들을 반갑게 만났다. 모두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들 중 여자들은 남쪽의 여자들처럼 화사한 옷을 입었다. 물론 그것은 유행에서 이삼십년 뒤진 것이지만 그런대로 좋아 보였다. 단체 사진 촬영을 부탁받으면서 나는 그들과 즐겁게 어울렸다. 코리아의 산들은 내가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통일된 나라에 있다는 어렴풋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우리는 상팔담 위의 꼭대기에 올라갔다. 장관이 펼쳐져 보였다. 청록색의 물을 둘러싸고 있는 매혹적인 산 계곡들은 금강산에 구비치는 더 깊은 심연을 만들어주었다. 기우는 10월의 태양에서 오는 황갈색의 빛이 그들 회랑을 비추면서 치솟는 첨봉들과 절벽들의 숨은 지형을 보여주었다. 그늘진 뾰죽한 봉우리들이 연이어졌다. 처녀 사면들은 자연 그대로의 숲으로 덮여있는데, 그 숲은 낡은 가죽처럼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 숲들의 빨간색과 소나무의 파란색 위에 일부 작은 덤불이 붙어있어, 마치 대마초 연기가 자욱한 아랍의 바자르(역주-시장)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페르시아 융단의 장미꽃무늬처럼 보였다. 마법의 융단이 이 금강산 꼭대기를 떠나는 이상적인 방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마법의 융단을 타고 떠나지 않았다. 대신 다시 걸어서 옥류동 계곡을 내려갔다. 미끈한 바위에 한문 글씨가 새겨져있는 것들이 보였다. 조선 시대의 어떤 묵객이 썼는지 모르겠다. 자연을 영구히 훼손시킨 그런 양반들의 행위를 김양수가 어떻게 경멸했는지를 내가 상기했다. 그 점에 관해서 나는 전적으로 그와 같은 생각이다.

Team KumgangsanHikersDiamond mountainsSangpal-damMyogil-sangManmulsang

다음 날 우리는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자동차로 온정령에서 백두대간을 넘었는데, 계획된 일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도중에 내가 그렇게 하자고 요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작은 터널를 지나고, 검문소도 지나서 비포장 도로로 내려가 다풍리 마을을 거쳐서 내금강 지역으로 진입했다. 내가 2008년 이후 이곳을 방문한 첫 외국인이었다. 곧 표훈사에 도착한 뒤 우리는 숲이 우거진 산길을 따라 만폭동으로 올라가 외부와 격리된, 완전히 텅 빈 내금강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아주 태고 그대로이고 사람이 아무도 없어 섬뜩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좋았다.

보덕암은 내가 예상한대로 장관이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아직 묘길상(妙吉祥: 역주-원래 이곳에 묘길상암이 있었으나 지금은 암자가 없고 마애 여래좌상만이 있어 그것을 묘길상이라고 부르지만 묘길상은 문수보살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 마애불이 비로자나불이라는 설과 미륵불이라는 설이 있다)은 보이지 않았다. 이 진짜 진귀한 보물에 아직 햇빛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더 걸어 올라갔다. 묘길상은 적어도 천년 된 것으로 모든 사람이 꼭 볼만한 아주 훌륭한 예술품이다. 숲 속의 산길이 굽은 데에서 나오자 앞에 나무가 없어 탁 트인 단이 나타났다. 그 뒤에 선황색(鮮黃色)의 절벽이 있고 그것에 15m의 양각된 좌불상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마애 좌불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장엄한 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현지인이 그들 자신의 역사적 유산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 크게 배려하지 못했다. 내가 산행 동료인 황성철에게 이 인상적인 마애 여래좌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내 자신의 관찰이 어디까지나 외국인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목을 빼어 마애불을 쳐다보았는데, 그가 잠시 숙고하더니 대답했다. “그 옛날 조상들이 만든 것을 보고 몹시 감탄하고 있어요.” 그의 대답을 듣고 보니, 이 여행이 나에게 매혹적인 것처럼 그에게도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내가 좀 숙연해졌다. 내가 말했다. “천년 전에 또는 이천년 전에 금강산의 계곡들과 봉우리들을 돌아다닌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황은 신중히 미소를 지으면서 그런 여행이 지복(至福)의 것이었음을 인정했다. 나는 중국 북송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다음같은 말을 상기했다. “만약 내가 금강산을 본 다음 날 죽는다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런 느낌을 가졌는지 어땠는지 모르겠다. 내가 황에게 말했다. “우리가 백두대간 프로젝트를 끝낸 뒤 언제 다시 금강산에 와서 2, 3주일 동안 이곳을 완전히 탐색합시다. 이 산에서 옛 은둔자와 나무꾼처럼 살면서(농담조로 말했다) 사진을 촬영하여 금강산에 관한 책을 내봅시다.” 그가 아직 경이로운 묘길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어요.” 내 마음이 다소 뭉클했다. 나는 북한의 역사적인 미와 자연의 미를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정치와 관계 없는 친구로서 북한을 탐승(探勝)할 비젼을 가져보았다. 아마도 옛 은둔자처럼 금강산을 돌아다닌 뒤에 나도 단순한 마음으로 그리고 후회 없이 금강산을 볼 줄 알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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